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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황교익 교수님의 인터뷰가 화제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4654686


"유교국가 조선에서 유교의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 지낼 필요가 없던 거죠. 조선 초기엔 양반이 전체의 5 ~ 10%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머진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 말에 와서 계급 질서가 무너진 겁니다. 양반 계급이 약 70%가 되는 거죠. 양반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서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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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양반은 전체의 5~10% 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선 말에 와 계급질서가 무너지면서 양반이 조선 인구의 약 70%가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소수의 양반만 지내던 제사를 거의 모든 조선 사람들이 지내기 시작하면서 기존 제사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원래의 제사모습에서 여성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제사의 주체는 남자였기 때문에 준비도 모두 남자가 하였고 제사도 모두 남자가 하였다.

또한 유교에서는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의 세세한 차례법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초기 제사상의 모습은 매우 간소하고 간략하였다고 한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양반이고 양반처럼 행동해야 대접받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허례허식이 생겨났다고 한다.

최근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필자의 모습을 돌이켜 보자면, 아버지는 경상도 부산 사람이었다.

부산 싸나이였던 아버지는 무뚝뚝함과 가부장적인 성격을 모두 가지신 그야말로 전형적인 대한민국 아저씨였다.

어렸을 때부터 명절이 되면 세명의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면서 열명이 넘는 가족들의 식사와 제사상 차리기를 담당하였다.

삼치 세끼 상다리 부러지게 꼬박꼬박 가족들에게 바쳐야 했고, 하루종일 튀김을 부치고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다른 가족들은 당연하게 앉아서 TV를 보거나 담소를 나누었고, 그나마 가정적이였던 첫째 큰아버지가 밤을 깍거나 걸레질을 하면서 며느리들을 도왔다.

그렇지만 제일 절정은 아마 식사 시간이 아니였을까 싶다. 식사시간에는 자연스럽게 큰 상 두개를 놓는데, 왼쪽상에는 할머니와 아들들 그리고 손자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오른쪽 상에는 손녀들과 며느리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데, 며느리들은 항상 뒤치닥거리를 하다 나중에 밥을 먹기 일쑤였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가 당연하다고 느꼈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며느리들도 늙어갔다. 허리가 아픈 엄마가 불쌍해 부엌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지만, 그중에 아들들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도울라 치면 손사레를 치며 말렸다. 나중에 어차피 하게 될 일이니 지금부터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또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고, 내가 결혼이 하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내 딸은 고생안하고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럴까? 엄마랑 둘이 죽을때까지 살까? 라고 장난치며, 엄마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여러번의 이직과 공부를 반복하다 어느덧 번듯한 외국계 기업의 대리가 되어 열심히 돈을 벌고 회사생활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프로포즈도 받았다. 시어머니는 같은 회사 다니는 며느리를 만나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첫번째 명절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튀김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다며 판을 깔아주셨다. 

남편도 열심히 전을 굽고 같이 뒷정리도 하였다. 친척들이 놀러와 담소를 나누는데 난데 없이 어머니가 한 말씀하신다.

'요새 남자들은 참 불쌍해.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해야 되니 쉴 수가 없어.'

계속 해서 그런 얘기를 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삼촌 중 하나가 웃으면서 말한다. 

'새색시한테 우리 민이 집안일 말라는 소리네. 아무것도 시키지 말랍니더'

문득 항상 부엌에서 뒤치닥 거리를 하는 엄마 생각이 나서 더 서글퍼 졌다. 나도 같이 돈을 벌고 집안일을 하는데 왜 남편만 불쌍하지?

남편과 같이 설거지를 하려고 폼잡으니 어머니가 남편은 저기 가서 쉬라고 하고, 너는 나랑 같이 설거지를 하자고 한다.

회사와 사회생활에서 동등했던 우리 관계에서 나의 위치는 어느새 제일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건강상의 문제와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공부를 하기로 했다.

힘들게 맞벌이로 일하는 선배들을 보며 지금 미리 자리를 잡아 집에서 애를 보며 일하기로 남편과 합의를 했다.

하지만 시댁에 회사를 그만 뒀다고 이야기를 하기가 겁났다. 항상 여자도 맞벌이를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어머니에게 차마 이야기를 할수가 없었다. 사실은 시댁에서 제일 아래로 떨어져 있는 나의 위치가 더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벌써 세번째 명절을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린 또 피터지게 싸우고 나는 또 서글프게 울었다.

남편은 말한다. 일년에 몇번 없는 명절인데 그냥 참고 넘어가면 안되냐고. 

하지만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튀김도 설거지도 뒤치닥거리도 아니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바닥까지 떨어진 나의 위치이다.


세번의 명절을 보내고 시머어니는 자연스럽게 나를 시키신다. 나보다 건장한 두명의 아들이 있는데 굳이 제일 약한 나를 부르신다.

그리고 가끔 뼈있는 말들을 하며 나의 가슴을 후벼파신다.

자신의 아들과 결혼했다고 남의 딸에게 나쁜 말을 해도 되는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아들과 결혼했다고 귀한 남의 딸에게 마구 일을 시켜도 되는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요즘 뉴스를 보면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10% 넘게 상승한다고 한다.

또 다른 뉴스를 보면 명절 때 인천공항을 방문하는 여행객의 수가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명절도 점점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세대가 바뀌면서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들이 고생하는 명절보단 산 사람들을 위한 즐거운 명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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